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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연구회 엮음, “디지털 시대의 민주주의와 포퓰리즘” (철학과 현실사, 2004)에 대한 서평으로 선생님께서 쓰신 글입니다.
출처: 『서평문화』 2004년 가을 ․ 제55집, pp. 83-87.

[83쪽] 1. 책의 가치가 대중의 선호에 좌우되는 지금에도, 학문적 토론이 실질적인 관심을 끌지 못하는 오늘에도, 좋은 학술서적은 다음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첫째, 유익해야 한다.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거나, 아니면 잊혀져 버렸거나 쉽게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지식을 일깨워줄 수 있어야 한다. 둘째 교육적이어야 한다. 단순히 사건의 전모를 전달함으로써 흥미나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보다 반복되는 사건에 대해서도 새로운 이해와 행동을 유도할 수 있는 일상으로부터의 조용한 변화를 지향해야 한다. 셋째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과거에 대한 법리적 판단을 넘어 미래를 구속할 정치적 선택이 기초할 사려와 안목을 가져다주어야 한다. 현실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조건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이 담긴 책을 독자들은 기다리고 있다.

2.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철학연구회가 2003년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과 토론을 묶어 올해 4월에 출판한 『디지털 시대의 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은 좋은 학술서적이다. 우선 이 책은 인문사회과학 여러 [84쪽] 분야에서 검증받은 연구자들로부터 다양한 의견과 유익한 정보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크게 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민주주의와 관련된 하계의 최근 논쟁뿐만 아니라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의 최대 화두로 등장한 포퓰리즘의 개념과 사례, 그리고 이 개념을 분석에 적용했을 때 나타나는 문제점을 포함하는 매우 폭넓은 지식을 선보이고 있다. 특히 이 책의 서두에 있는 이한구 교수의 논문은 대의민주주의의 문제점들을 보완하기 위해 등장한 대안, 그리고 ‘대중이 원하는 것이 곧바로 정책이 되어야 한다는 교설’로 정의된 포퓰리즘에 대한 개괄적인 지식을 얻기에 매우 유익하다. 이런 점에서 인터넷의 급속한 확산이 가져온 정치사회적 변화에 대한 전체적인 밑그림을 필요로 하는 독자나, 민주주의와 관련한 최근의 논의를 중심으로 한국사회를 조명해 보려는 연구자에게 이 책은 좋은 학술서적이다.
저자들이 자기 분야의 독특한 접근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 또한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이다. 개별 논문에 대한 논평을 함께 실어놓은 책의 구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현상에 대한 설명과 주장을 병렬적으로 나열하기보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진지한 토론을 통해 독자의 자율적인 판단을 유도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예를 들면, 디지털미디어의 비약적인 발전이 민주주의의 실질적 진전과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지에 대해서도 다양한 견해와 해법이 제시된다. 박형준 교수는 정보화사회에서 정보의 독점이 가져오는 계층별․세대별 불평등 구조의 심화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들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고, 이동수 교수의 논문은 정치철학적 관점에서 인터넷을 참여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사유방식의 근본적인 변화를 통해 정치체제의 변동을 가져오는 동인으로 조명하고 있다. 또한 윤평중 교수는 인터넷으로 형성된 담론공간에서 발생할 수 있[85쪽]는 탈정치화(정치체제의 통합성과 통일성의 상실)의 위험을 사회철학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으며, 이상훈 교수의 논문은 네티즌이 자율적으로 형성하는 사이버 세계가 갖는 지속적인 변화의 수용 가능성과 새로운 형태의 집단적 소외를 통한 지배의 위험성을 탈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이들의 견해는 전문가들의 간단한 논평을 통해 독자가 참여할 수 있는 논의의 장으로 유도된다. 보다 더 실증적인 자료와 좀더 상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상이한 해석을 통해 반론을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좋은 세미나 교재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여러 수준의 독자들을 논의의 장으로 끌어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갖는 또 하나의 장점은 회고적 성찰과 현실적 고민이 적절하게 조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책의 후반부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김우택 교수는 포퓰리즘을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의 병리적 특징으로 단정하기보다 이러한 현상의 반복을 가져오는 정치경제적 조건에 주목한다. 김영일 교수는 한국사회에서 포퓰리즘의 출현이 대의민주주의의 한계와 일정 정도의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서병훈 교수는 플라톤의 『국가』 8권과 9권에서 전개되는 민주정의 몰락과 전제정의 출현에 대한 서술을 토대로 포퓰리즘을 선동적 정치지도자와 무분별한 대중의 결합으로 상정하면서도, 대중의 욕구를 불법(paranomia)과 무례(hybris)로 비하하기보다 혼합정체를 통해 순기능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정원섭 교수는 포퓰리즘에 내재하는 만민평등과 특권철폐는 강조하지만, 중우정치의 위험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홍윤기 교수는 인민 또는 국민의 의미가 배제된 한국적 ‘포퓰리즘’ 담론의 위선과 민중주의적 의사결정이 갖는 체계성과 전문성의 상실을 동시에 극복하려[86쪽]고 노력하고 있다. 논평자들도 상식의 강제와 이념의 주입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에 대해서는 저자들과 마찬가지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책은 독자에게 성급한 판단보다 미래지향적 사려와 안목을 제공할 수 있는 좋은 책이다.

3. 견해와 접근방법이 상이한 학자들이 협동연구를 진행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학제적(interdisciplinary) 연구의 경우, 일반적으로 하나의 주제를 놓고 문제제기와 토론을 하는 방식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별 과제와 전체 주제의 연관성이다. 저자들 간에 주제의 내용과 범위에 대한 사전 논의가 없으면 전문적 지식을 갖춘 독자라고 하더라도 핵심을 쉽게 놓칠 수 있다.
이 책도 이러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디지털 시대’라는 구분이 개별 논문에 일관되게 적용되고 잇는지 의문이다. 서구 학계의 경우에도 디지털 미디어의 확산과 민주주의의 상관관계에 관한 학술적 관심은 민주적 심의의 가능성과 다양성의 파괴여부에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서구 학계의 초점은 조금 다르다. 이 책의 저자들은 주로 대중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서구 학계는 디지털 미디어가 형성하는 조건 자체에 주목한다. ‘사용자 정의’를 통한 정보의 사전 차단,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만의 의사소통을 통해 나타나는 집단 극단화(group polarization), 그리고 시민적 연대의 약화를 가져오는 조건이 주된 관심사이다. 이 책을 통해 디지털 미디어만이 형성 조건에 대한 고민을 좀 더 읽을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4. 지금은 결합할 수 없을 것 같은 인식들의 혼합을 가능하게 만들 상상[87쪽]력이 필요한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에 철학연구회가 이 책을 통해 다양한 논의의 장을 마련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인터넷을 통해 민주주의의 이상이 실현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도, 새로운 형태의 중우정치라는 비관적 견해도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시점이라 더욱 그러하다. 법리적 판단은 과거의 사건을 다루지만, 정치적 판단은 공동체의 미래를 좌우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일반 독자들에게는 사려와 안목을, 정책입안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입장을 재검토할 수 있는 기회를, 학자들에게는 교육의 내용을 심화시킬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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