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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설익은 공화주의 바람…경계해야”
공화주의 연구 곽준혁 교수

‘비지배 자유’ 공익 앞세운 공동체주의완 달라 “공화주의 구호 외치기 전에 학문적 숙성부터”

“구체화된 원칙이나 제도적 구상을 깊게 고민하기보다, 공화주의의 수사적·수단적 가치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

곽준혁(42·사진) 고려대 교수가 최근 국내 사회과학계와 정치권 일각에서 진행중인 공화주의 논의에 일침을 놓았다.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외래 사조를 수입하던 20~30년 전과 마찬가지로, 사상사적 전통이나 사회적 맥락, 담론이 내장한 이론적 문제의식에 진지하게 천착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때그때 유행하는 담론을 수입해 적당히 활용하다가 새 사조가 나오면 별 고민 없이 내다버리는 것, 우리 지식인 사회의 고질병입니다. 휴대전화 갈아치우는 것과 다를 게 없어요. 유사한 조짐이 지금의 공화주의 논의에서도 감지됩니다.”

곽 교수는 미국 시카고대에서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공화주의·헌정주의 등 고전 정치사상의 현대적 적용을 고민해온 소장 정치학자다. 최근 영미권 공화주의 연구의 권위자인 리처드 벨러미와 리처드 대거 등이 함께 쓴 <공화주의와 정치이론>(까치)을 번역해 내놓은 데 이어, <비지배 자유> <비지배적 상호성>이란 제목의 공화주의 연구서를 올해 안에 출간할 예정이다.

12일 안암동의 고려대 연구실에서 만난 곽 교수가 가장 신랄하게 꼬집은 것은 공화주의에 대한 섣부른 일반화였다. 내부의 다양한 갈래들과 그 사이에 존재하는 인식론적 차이를 무시한 채 무리하게 뭉뚱그려 공화주의를 정의하는가 하면, 학문적 논의가 무르익지도 않았는데 정치인들이 수사적 차원에서 공화주의란 말을 남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서구 학계의 이론적 성과가 공유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했다.

“한국에선 여전히 공화주의로부터 단합이나 조화, 연대 같은 공동체적 가치만 찾는 경향이 있는데,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최근의 공화주의는 갈등을 균열의 요인으로 위험시하기보다, 당연히 존재하는 사회현상이며, 잘 조정되면 건강한 사회를 형성하는 동력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거든요. 연대보다는 다양성을, 안정보다는 갈등을 좋은 사회의 징표로 보는 것이 오늘날의 공화주의입니다.”

곽 교수가 볼 때 조화와 통합, 공공선만을 강조하는 것은 공화주의라기보다 공동체주의에 가깝다. 이런 공동체주의는 전체의 공익을 앞세워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 요인을 내포한다. 하지만 공화주의는 다르다. 이 점은 고전적 공화주의의 독특한 자유 개념에서 잘 드러나는데, 여기서 자유는 ‘간섭이 부재한 상태’를 의미하는 자유주의적 자유가 아니라 ‘타인의 자의적 의지에 종속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요컨대 사적인 지배나 주종적 예속관계로부터 자유다. 이를 공화주의에서는 ‘비지배 자유’라고 이른다.

“예를 들어볼까요? 갑이란 노비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과 따로 사는 외거노비예요. 게다가 주인과 친하기까지 합니다. 어느날 주인이 말합니다. 넌 이제부터 소출의 일부를 갖다주지 않아도 돼. 자유주의자들은 이를 두고 갑이 자유를 얻었다고 말할 겁니다. 신체적 간섭도 경제적 수탈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공화주의자들이 보기에 갑은 여전히 노비입니다. 주인의 마음이 바뀌거나 주인이 죽으면 갑이 누리는 자유도 몰수되니까요.”

이처럼 자유를 ‘비지배’로 파악할 경우,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개입하고 간섭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례로 세금을 거둬 빈곤층에게 적절한 복지를 제공하는 것은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개인의 간섭받지 않을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비지배’의 관점에서 본다면, 빈곤 때문에 타인의 의지에 예속되는 상황을 막는다는 점에서 복지의 제공은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장하는 조처다. 거꾸로 국가가 비지배의 조건을 훼손하는 형태로 삶에 개입한다면 여기에 저항할 수 있는 논리 역시 공화주의는 제공한다. 곽 교수는 “국가의 개입과 그것에 대한 저항을 동일한 조건에서 정당화하는 개념은 공화주의의 비지배 자유뿐”이라고 말한다.

이런 공화주의에서 신자유주의 광풍 앞에 무기력한 개인으로 전락한 시민들의 삶과, 비효율과 무능력의 상징으로 낙인찍힌 민주주의를 구원할 희망을 찾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곽 교수는 본다. 문제는 재분배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적 가치로 공화주의 이념을 활용하는 경우다.

“공화의 조건을 구축하기 위해 재분배의 필요성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재분배 정책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공화의 가치를 빌려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 경우 굳이 공화주의란 이름을 사용할 이유가 없습니다.”

곽 교수는 지금 시급한 것은 공화주의에 대해 한층 정교한 학문적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의 구호나 지침으로 대중에게 제시하기 전에 밀도 있는 심의와 토론으로 공화주의 내부의 차이를 선별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얘기다. 곽 교수는 그 계기를 <공화주의와 정치이론>이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글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한겨레신문 2010년 1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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