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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사회는 새로운 이념을 원하고 있다. 마치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이 과거에는 전혀 없었던 것처럼, 현상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미래에 대한 전망까지 모두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판단기준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찾고자하는 것이 전혀 새로운 것들인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주 새로운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진정 새로운 것을 좋아할 지를 속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기대하고 계획했던 일이 우연적인 사건으로 인해 실패할 때 느끼는 감정처럼, 완전히 새로운 것은 불안이 기대보다 너무 커서 삶의 기쁨을 제공하는 새로운 가치가 되기는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새로움이 던져주는 두려움과 기대의 길항을 ‘카이노스’(kainos)라는 단어 속에 담아두었다. 이 단어는 과거에 만들어졌지만 아직 사용되지 않았던 것을 지칭했고, 이 단어를 통해 사상가들은 사람들을 인간의 한계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 유도했다.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유 중 하나가 이미 있었지만 실현되지 못했던 ‘새로운 신들’(kainous theous)을 소개했다는 죄목이었고, 성경의 ‘새(neos)술은 새 부대(kainos askos)에 담아야’한다는 말도 실현되지 못했기에 생소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약속을 상기시키기 위함이었다.

자유주의적 고민 다시 살펴봐야

이런 맥락에서 우리의 관심에서 다소 멀어진 자유주의의 오랜 가치들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가 갈등은 불가피하지만 잘 관리하면 건강한 사회를 만든다는 확신이다. 이 확신은 종종 ‘다원성’이나 ‘권력 분립’과 같은 표현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무엇보다 자유를 보장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갈등에 대해 낙관적인 태도를 요구한다. 반면 한국 사회는 언제부터인가 갈등에 대한 낙관적 태도보다 비관적 전망에 익숙해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무분별한 갈등이 가져올 정치적 파국은 신중히 대처해야겠지만, 갈등이 없는 사회를 좋은 사회의 전형으로 제시하는 분위기에서는 자유주의의 숨결에 내재하는 다양성과 개인의 선택이 갖는 의미가 위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가치는 ‘관용’(toleration)이다. 이견을 가진 상대방의 의사에 대한 호불호(好不好)가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이견에도 불구하고 결정에 대한 책임을 공유하고자한다는 점에서 관용은 무관심과 구별된다. 이견을 무시하거나 참는 것이 아니라, 입장의 차이가 대화를 통해 극복될 수 있다는 신념이 바로 자유주의적 관용의 정신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자유주의적 관용이 기초할 토대가 점점 약해져가는 것 같다. 이견을 가진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묵인을 요구하거나, 다양성을 내세우며 설득을 거절하거나, 개인적 판단의 유보를 이유로 결정된 사안에 대한 책임의 공유를 회피하는 것을 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 만약 이러하다면, 무관심이 관용을 대체함으로써 상호존중이라는 자유주의적 가치가 수사적 기교로 전락될 수 있다.

세 번째 가치는 일반인들의 심의를 통한 결정도 탁월한 전문가의 판단보다 나을 수 있다는 역발상이다. 제도적 구상은 늘 두 가지 입장을 수반한다. 하나가 현자를 통한 질서(taxis)의 확립이고, 다른 하나가 구성원에 의해 발견되어지는 질서(kosmos)의 구현이다. 특히 후자는 절대 권력에 저항했던 자유주의의 경험을 대변한다. 경제학자 하이에크(Friedrich Hayek)와 같은 신자유주의자들조차도 아래로부터 위로 형성되는 법이 자유의 길이라고 이해하고 있을 정도다. 아쉽게도 한국 사회는 발견되어지는 질서보다 카리스마적 리더십에 더 주목하는 경향을 보인다. 위로부터 아래로 부여되는 질서가 가져올 위험에 둔감했던 자유주의가 전제의 유혹에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돌이켜 볼 시점에 우리가 서 있는지도 모른다.

온고지신으로 새로운 답을 찾기를

자유주의가 당면한 위기는 한국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핵심적인 가치를 시대와 상황에 맞게 고치고, 상실된 좋은 덕성들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것은 한국 사회만의 문제일 수 있다. 만약 한국 사회에서 경험된 자유주의적 가치들이 비자유주의적인 것으로 비춰진다면, 우리는 우리가 자유주의적 가치라고 믿고 있는 것들을 토론하고 분석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적법절차에 상상력을 닫아두기보다, 경쟁적으로 새로운 정치적 이념만을 찾기보다, 자유주의가 유지시키고 발전시켜온 가치들을 다시금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정치사회적 문제들은 다양성과 갈등, 상호존중과 관용, 그리고 상식과 제도의 변증법적 자기 수정 속에서 진화된 자유주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고민이 없다면, 새로운 이념을 통해 배양될 시민적 품위는 미래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전혀 충족시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여기에 서양 정치사상이 ‘새로움’이라는 단어를 통해 전달하고자했던 앎의 진정성, 그리고 동양의 공자(孔子)가 말한 ‘옛 것을 익히어 새로운 것을 아는 것’(溫故而知新)의 지혜가 담겨있다.

곽준혁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동아일보 2010년 2월 12일자(금요일 A30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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