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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적 자유’와 ‘정치적 안정’의 균형은 제도사상사에서 오랫동안 실현하고자 노력해 온 숙제들 중 하나다. 그러기에 이 둘 사이의 균형은 정치철학에서도 중요한 주제들 중 하나로 취급되어 왔다. 플라톤은 지나친 ‘자유의 추구’가 민주주의의 몰락을 가져온다고 말했고, 루소는 정치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국가를 결성한 이유 또는 ‘일반의지’(volonté générale)를 형성한 이후에 자유로운 토론이 가져올 위험성을 우려했으며, 존 스튜어트 밀조차도 ‘자유’와 ‘방종’은 엄연히 다른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미국 건국의 아버지 제임스 메디슨이 한 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파벌이나 갈등이 두려워 자유를 몰수하거나 지나치게 제한하는 것은 ‘불이 날까 두려워 공기를 없애버리는 것’과 같다는 지적 말이다.

마키아벨리도 피렌체에 적합한 헌정체제를 구상하면서, ‘시민적 자유’와 ‘정치적 안정’의 균형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를 우선적으로 고민했다. 『강론』 3권 9장에서 보듯, 마키아벨리는 시대적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정치제도가 반드시 갖추어야할 요소들 중 하나로 보았다. 따라서 그는 시민적 자유와 정치체제의 안정이라는 요구가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조적일 수 있는 제도를 구축하고자 했다. 문제는 시민적 자유를 보장하면 정치적 안정이 깨질 수 있다고 믿었던 당시 귀족들과 지식인들을 어떻게 설득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혁명과 반혁명으로 점철된 피렌체의 역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정치적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신념을 심어주었고, 대부분의 귀족들과 지식인들은 정치적 안정을 위해 시민의 자유와 정치적 참여를 제한하거나 억제해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마키아벨리는 그만이 할 수 있는 역설적 선택을 한다. 시민의 자유뿐만 아니라 ‘시민을 무장시켜야한다’는 주장까지 전개하고, 변화의 요구들이 합의된 제도화의 방법까지도 바꿀 수 있는 정치체제를 꿈꾸기 시작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공화정’(la Serenissima Repubblica)으로 평가받던 베네치아를 모방하자고 목소리를 높일 때, 그는 ‘소란스러운 공화정’(una tumultuaria repubblica) 중의 하나로 간주되던 로마에 주목했던 것이다. 적절히 다루어진다면, 갈등은 안으로는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고, 대외적으로는 강한 나라를 건설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다.

베네치아의 신화: 혼합 정체와 협소한 정부

‘베네치아의 신화’(Il Mito di Venezia)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1117년 교황 알렉산더 3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의 평화조약을 중재한 이후, 베네치아는 로마 교회와 신성로마제국과 함께 이탈리아 반도를 좌우하는 열강 중 하나가 되었다. 최초에는 이탈리아와 발칸반도 사이의 해적들을 제압하려고 몇몇 도시들을 장악한 것이 팽창의 시작이었지만, 이후 그리스 지역과 크레타 섬까지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자 베네치아는 무시하지 못할 나라로 성장했다. 1204년 4차 십자군 원정 때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하면서 베네치아는 사실상 제국으로 거듭났고, 1380년 해상무역의 경쟁 도시였던 제노아까지 제압하면서 명실상부한 지중해의 패권국가가 되었다. 16세기 초에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주변 열강들을 불러들여 베네치아를 상대로 동맹을 결성했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밀과 소금을 독점해서 얻은 베네치아의 힘은 이탈리아 본토에서도 가히 가공할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신화’는 단순히 물리적인 힘의 팽창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797년 나폴레옹에게 항복할 때까지, 베네치아는 문화적으로도 유럽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무엇보다 15세기 후반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급성장한 인쇄 문화가 유럽을 선도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탁월한 인쇄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작권과 출판의 자유를 동시에 보장하는 선진적인 제도, 그리고 삽화와 도판을 만들 수 있는 인력들이 풍부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마키아벨리를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이 새 책을 구입하기 위해 베네치아에 사람을 보내는 일이 허다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지식인들의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다. 일찍이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는 베네치아를 “자유, 평등, 그리고 정의의 고향”이라고 말했고, 피렌체 사람들은 베네치아라고 하면 ‘지혜로운 솔로몬의 기억’(la memoria del savio Salomone)을 떠올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는 베네치아와 피렌체 지식인들이 재생산하는 ‘베네치아의 신화’에 노골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한다. 『강론』 1권 5장에서 밝히듯, 그는 베네치아가 소수의 사람들만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협소한 정부’(governo stretto)를 지향했다는 것, 그리고 문호를 개방하지 않고 시민을 무장시키는데 인색해서 자멸할 수밖에 없는 제국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실 베네치아는 당시 피렌체 지식인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가능한 최선의 정체’로 간주된 ‘혼합정체’(governo misto)의 실질적 모델로 간주되었다.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이 갖고 있는 장점을 고루 갖춘 정치체제로, 그리고 실제로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지속된 안정적인 정치체제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이주민을 받아들이지 않은 베네치아의 폐쇄적인 사회구조, 그리고 처음 도시를 세운 귀족집단의 자제들이 계속 독점하고 있는 베네치아의 정치 공간을 혐오했다. 특히 25세 이상의 귀족자제들로만 구성된 ‘대평의회’(Il Maggior Consiglio)가 어떻게 민주정적 요소인지 그는 의아해 했다.

마키아벨리에게 베네치아는 ‘조용한 공화정’이 아니라 ‘죽은 공화정’이었던 것이다. 그에게 ‘솔로몬의 지혜’를 상속받았다는 베네치아의 종교적 허세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기독교 공화정’이라는 구호는 비단 베네치아만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면 그는 ‘베네치아의 신화’가 전달하는 ‘협소한 정부’를 통한 ‘정치적 안정’이라는 선전은 결코 좌시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베네치아는 ‘오래 존속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 무엇도 배울 것이 없는 정치체제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강론』 1권 2장에서 보듯, 마키아벨리는 베네치아가 오랫동안 살아남은 이유조차도 섬나라라는 지정학적 조건과, 다른 나라들이 배를 만들지 못한 상황에서 찾고 있었다. 한마디로 베네치아는 운이 좋았을 뿐, 조그만 도시 테베(Thebe)의 반란에 무너져버린 스파르타와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로마: 시민적 자유와 끝없는 팽창

마키아벨리에게 ‘가능한 최선의 정체’는 당시 지식인들에게 ‘소란스러운 공화정’으로 낙인이 찍힌 로마 공화정이다. 그는 『강론』 1권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첫째, 그는 로마 공화정이 스파르타와는 달리 리쿠르고스와 같은 탁월한 인물을 통해 일시에 확립된 정치체제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한다. 그의 해석을 따르자면 로마는 ‘우연’(caso)을 통해 ‘혼합 정체’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때 ‘우연’이라는 말은 폴리비우스와 같은 역사가가 로마 공화정의 성장과정을 설명할 때 사용했던 ‘자연에 의해’(kata physis)라는 말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한편으로는 ‘철인 왕’이 없더라도 ‘가능한 최선의 정체’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내포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 공화정이 호민관제도를 창설함으로써 혼합정체에 도달하기까지의 변화를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것으로 보지 않겠다는 의지가 내재된 것이다. 포르투나(fortuna)와 같은 초인간적 원인들이 행위의 조건과 결과를 제약하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그에게 로마 공화정은 최소한 인간의 의지로 순환과정을 바꾸거나 되돌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였던 셈이다.

둘째, 마키아벨리가 ‘우연’을 대신해서 사용하는 ‘우연한 사건’(accidente)이라는 단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는 귀족과 인민의 ‘갈등’이 로마 공화정을 ‘혼합 정체’로 이끌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가 말하는 ‘우연한 사건’은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거나 제도 내로 편입될 수 있는 갈등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로마 시민들이 도시를 방어하기를 거부하며 집단적으로 불만을 표했던 ‘철시(撤市)’(secessio)로부터, 현대적 의미의 혁명처럼 폭력을 수반하거나 제도 밖에서 벌어지는 폭동까지 모두 포괄한다. 비록 그는 『피렌체사』 3권 1장에서 로마 공화정의 민중들은 귀족들로부터 모든 것을 앗아가려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강론』 1권 37장에서 보듯 그는 로마 공화정에서 벌어진 귀족과 인민의 갈등이 로마 공화정의 안정성을 어떻게 위협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강론』 2권 2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로마 공화정의 모든 좋은 것들은 “자유로운 삶”(vivere libero)에서 나왔고, 지금 피렌체의 무질서는 “노예적 삶”(vivere servo)에서 비롯되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시민적 자유로부터 사익과 공익 모두 성장할 수 있다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마키아벨리는 ‘시민적 자유’를 로마 공화정이 ‘제국’으로 성장하게 된 동력으로 보고 있다. 그는 ‘소규모 자치도시’로는 시민적 자유를 지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그는 『군주』 3장에서 영토를 “획득하기를 열망하는 것은 분명 매우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일”이라고 전제한다. 그리고 『피렌체사』 3권 1장에서와 같이 정치사회적 갈등이 ‘군사적 덕성’을 고취시키는 방식으로 종결되어야한다고 충고한다. 사실 『강론』 2권에 묘사된 제국으로서 로마 공화정은 주변 지역을 다스리는 방식에서 ‘참주’와 다를 바가 전혀 없다. 귀치아르디니조차 ‘팽창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라며 그의 견해에 반발했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시민에게 자유가 보장되면 전쟁 수행에 가장 중요한 ‘인력’과 ‘돈’이 준비되고, 시민들이 스스로의 자유를 지키는 방법을 체득하면 독립뿐만 아니라 제국을 건설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고 거듭 강조하고 나선 것이다. 아마도 마키아벨리는 국가들 사이의 관계에서는 ‘비지배 자유’나 ‘갈등을 통한 공존’을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6212100245&code=210100&s_code=af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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