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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없는 민주주의, 비(非)지배 자유로 극복해야

1. 프롤로그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데모스 윤리학』에서 정치를 건축에 빗대어 설명한다. 건축가에게 건물의 용도에 대한 숙지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듯, 정치가에게도 당면한 문제에 얽힌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넘어 문제를 통해 반영된 절박한 사회경제적 요구를 제도화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최근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불거진 선거구 획정과 관련된 정치권 내부의 갈등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갈등의 원인이 1인 1표라는 동등한 가치를 확보하는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갈등은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실험을 통해 한국 사회가 노정시켰던 문제 대부분과 관련된다.

2. ‘정치’에 대한 무관심

무엇보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시민들의 무관심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거구 획정과 관련된 지금의 갈등을 현직 국회의원들의 이해관계나 총선에서의 세력판도를 둘러싼 이권다툼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정치에 대한 불신을 확인시켜주는 사안일 뿐, 자기의 목소리가 제도를 통해 대표되는 절차와 연관시키지 않는 것이다.

사실 ‘정치적 대표’에 대한 불만은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대부분의 나라가 경험하고 있다. 오랫동안 민주주의를 실험한 나라에서도 거리를 점거해서라도 자기들의 의사를 전달하려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고, 시민들과 정당의 일체감을 자랑하던 사회에서도 기존의 채널로는 ‘하부정치’(sub-politics)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는 상황이 속출하고 있다. 한마디로 ‘대표를 통한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은 전(全) 지구적 현상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대표’에 대한 불신은 그것만이 갖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바로 불신의 대상이 ‘제도’가 아니라 ‘정치’라는 점이다. 일반 시민들의 ‘대표’에 대한 불만은 대체로 ‘정치’에 대한 환멸에서 기인한다. 실제로 대다수의 시민들은 자기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기초의원 이름조차 모르고, 여러 여론조사의 결과가 보여주듯 시민들에게 정치란 ‘무능’과 ‘부도덕’이라는 이름으로 각인되어 있을 뿐이다.

3. ‘정치’ 없는 민주주의

문제는 정치를 옳고 그름을 놓고 벌이는 다툼으로 정의하거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으로 보는 경향이다. 전자가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라면, 후자는 너무나도 절망적인 현실주의다. 솔론(Solon)의 개혁이 어느 일방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싸움의 결과가 아니었듯이, 민주주의에서도 갈등을 조정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동일한 맥락에서, 갈등의 조정을 ‘힘’으로만 관철하려는 것은 신중하지도 민주적이지도 않다.

만약 이러한 극단적 사고만이 팽배하다면 결과는 참혹할 것이다. 이른바 ‘정치’없는 민주주의, 즉 극단적인 대치는 있어도, 갈등이 제도의 창출로 귀결될 수 없는 민주주의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민주주의의 반복된 실패는 한편으로는 ‘정치’에 대한 냉소를 가져오고, 다른 한편으로는 ‘힘’에 대한 맹신을 부추긴다. 마치 마키아벨리가 한탄했던 피렌체처럼, ‘분열이 종파로, 종파가 파멸(rovina)’로 치닫는 정치적 파국이 불가피한 것이다.

4. 시민의 견제력

그러기에 ‘대표’가 없는 민주주의를 말하기에 앞서 살펴봐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아테네 민주정도 시민의 대표로 구성된 평의회(boule)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출했던 로마 공화정과 마찬가지로, 아테네 민주정도 ‘추첨’을 통해 대표를 선발했다는 것이다. 즉 대표의 유무가 대의 민주주의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열쇠는 대표의 선출 방식, 그리고 선출 방식을 지탱했던 제도다. 로마 공화정이 대표의 ‘탁월함’을 강조한 것과는 달리, 아테네 민주정은 대표와 대표되는 시민 사이의 ‘유사성’을 핵심적인 가치로 삼았다. 그러나 후자가 선출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했던 제도의 방향은 전자와 큰 차이가 없었다. 바로 ‘석명(釋明)성’(accountability)이다.

아테네 민주정도 로마 공화정과 마찬가지로 임기가 끝난 대표에게 위임된 권한의 행사에 대한 책임을 묻는 제도들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제도들은 추첨으로 선출된 대표도 재임기간 동안 공동체를 위해 성실하게 맡은 바 업무를 수행하도록 규제했고, 선거에서 ‘낙선’ 가능성을 통해 정치적 대표를 수직적으로 견제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가져왔다.

반면 우리의 선출 방식은 책임 없는 정치권력을 방관하고 있다. 전문성과 합리성을 이유로 비대해진 정부 조직은 시민의 견제가 가능한 정도를 넘어섰고, 시장의 논리에 잠식된 공공기관들은 공공성에 대한 도덕적 책무를 망각했으며, 정치적 대표들은 남발한 공약을 이행하지 않아도 책임지지 않는다. 대표를 선출하는 제도는 있지만 석명성은 확보할 수 없고, 권력에 대한 견제는 제도가 아니라 운동에 맡기고 있다.

5. 에필로그: 비(非)지배 자유

이제 ‘민주정치’의 목적을 재설정할 필요가 있다. 초점을 ‘심의’와 ‘참여’라는 추상적 이상으로부터 책임성을 확보할 수 있는 구체적 제도로 전환해야 한다. 엄밀하게 말해 ‘심의’와 ‘참여’는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심의’는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집단적 의사를 결정하는 방식이고, ‘참여’는 권력을 견제하고 다수의 의지를 확인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아테네 민주정이 지향하던 바를 ‘자유’(eleutheria)라고 말한다. 이때 다수는 진리나 신념이 아니라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적 조건’을 지키기 위해 정치에 참여한다. 그리고 마키아벨리는 『군주』에서 이러한 정치를 ‘비(非)지배’(non-domination)라는 말로 정의하고, 타인의 자의적 지배로부터의 자유로운 조건을 확보하고 유지하는 것이 다수가 주체인 정체의 ‘가능한 최선’이라고 충고한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선거구 획정과 관련된 논의도 ‘표의 등가성’으로부터 비지배를 보장하는 조건에 대한 시민적 숙의로 전환되기를 소망한다. 왜냐하면 운동이든 정치든, 지역 대표성이든 인구 대표성이든, 지배가 아니라 비지배를 지향할 때, 시민은 다시 정치의 장(場)로 돌아오고 대표는 훌륭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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