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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3D 업종이다

곽 준 혁(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1.
공부법에 대해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오랜 시간 고민했다. 부족한 내 스스로의 공부법을 담담한 언어로 표현해야 할지, 아니면 충격으로 다가왔던 지난 몇 년간의 선생으로서의 경험을 서술해야 할지 망설여졌던 것이다. 그러나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가장 말하기 어려운 부분을 말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점점 분명해졌다.

거의 대부분의 선생님들과 선배들이 그러했듯이, 나도 강단에 오르며 다짐한 바가 있었다. 다음 세대의 연구자들에게 유학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일 수 있도록, 나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고 최선을 다해 가르치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러나 겨우 4년이 지난 지금, 그러한 나의 결심에 대해 적지 않게 회의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공부하고자하는 의욕이 없다는 것이 큰 이유다. 선생의 질만 높이고 학생에게는 관심이 없는 학교를 탓할 수도 있고, 사회를 원망할 수도 있고, 전망을 한탄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장학금 하나 기대할 수 없는 시절도 있었고, 전망은 예전에도 지금처럼 불확실했다. 그런데 무엇이 학생들로부터 공부에 대한 열정을 앗아갔는가 말이다.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학생들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스스로가 문제를 발견함으로써 자신의 선택과 노력을 책임지는 자세부터 가다듬으라는 것이다. 사실 운동을 하려는 사람에게 운동기구가 필요하듯, 공부를 하고자하는 사람에게 공부법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3D업종인 공부에 대해 간략히 이야기하고자 한다.

2.
첫째, 공부는 자기존엄(dignity)의 확인과정이다. 다른 모든 일들이 그러하듯이, 연구자에게도 스스로의 선택과 스스로의 행위에 대한 애정이 요구된다. 석사를 마치고 계속 연구자의 길을 걷기로 했든지, 아니면 아직 진로를 두고 고민 중이든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학원이라는 공간에서 지금 연구자로 서 있다는 사실이다.

자기존엄의 확인과정은 때로는 오이디푸스의 고통을 수반하고, 때로는 프로메테우스의 세계에 대한 환상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을 헤매는 나비처럼, 때로는 고된 하루를 통해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하는 자신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확인과정이 없다면, 한 사람의 연구자는 겉치레와 허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다.

둘째, 공부는 자기훈련(discipline)이다. 공부는 책상위에 오래 앉아있는 훈련부터 시작해야 한다. 물론 천재적 두뇌나 기발한 집중력이 시간으로부터 독립된 결과를 가져다줄 수는 있다. 그러나 오늘도 외국의 학생들이 24시간 도서관을 밝히듯, 콩을 심은 곳에 콩이 나고 팥을 심은 곳에는 팥이 날 수 밖에 없다. 토요일과 일요일에 대학원 학생들보다 선생들이 더 많은 교정에서 다음 세대의 학자적 미래를 기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부끄러움을 이겨내는 훈련도 필요하다. 교육은 부끄러움으로 시작된다. 모른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가지고 우리는 선생과 제자로 만난다. 선생은 적절한 방법으로 부끄러움을 주고, 학생들은 부끄러움을 이겨내려고 노력한다. 장인의 손에 맡겨진 질그릇처럼 부끄러움으로 부서지고 또 다시 빚어지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발제를 하는 날에 결석하고, 자기가 맡은 발제 과제만 읽어오고, 공부보다 일상이 더 바쁘면서도 칭찬받기만을 원하는 연구자에게는 무엇보다 부끄러움을 자각하고 이겨내는 훈련이 필요하다.

셋째, 공부는 속성(diagenesis)을 통해 완성된다. 물론 사물이나 대중의 의사로부터 일정 정도 거리를 둠으로써 연구자는 단련된다. 그리고 삶의 세계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서 보다 궁극적인 원인을 고민해야할 때도 있다. 그러나 삶의 세계를 해석하고 삶의 세계가 구성되는 모습을 연구하는 공부는 단절이나 고립을 통해 성숙될 수 없다.

공부도 생활이다. 함께 독서하고, 함께 논의하고, 함께 나누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어울림이 없이 행사로 끝나버리는 수업발제, 자기의 의견에 경청하기를 원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발표에는 무관심한 태도,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라져버리는 학생들의 뒷모습에 우리의 생활은 황폐해져만 간다. 공부에서도 삶의 질을 이야기할 수 없다면, 지식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풍요롭게 할 수 있을까 말이다.

3.
나는 밤에 가끔 학생들의 공부하는 공간을 찾는다. 책 속에서 스스로의 얼굴을 발견하는 친구들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토요일과 일요일에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면, 업어주고 싶은 충동이 느껴진다. 이들과 국수 한 그릇이라도 할 때면,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마음이 들뜬다. 이들의 눈에서 같은 길을 걷는 연구자의 고뇌, 그리고 선생을 선생답게 만들어주는 시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어려운 시간 속에 있을지 모른다. 자동차 모델을 바꾸듯, 연구자에게 대중의 선호에 답하라는 사회적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거세다. 그렇다고 팽배해진 지적 무관심에 맞서 고립의 길을 자초할 수는 없다. 이제 소크라테스가 피레우스로 내려오듯 삶의 세계로의 여정을 준비해야할 때다. 이러한 여정의 준비는 무엇보다 공부가 3D업종이라는 자각에서 시작되어야한다. 이러한 자각으로부터, 삶의 세계로의 여정이 가져올 새로운 충격이 절제된 공부법을 통해 순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 ‘공부론‘에 관한 글을 써 달라는 고려대 대학원신문사의 부탁을 받고 쓰신 글입니다. <대학원신문> 제145호 2007년 12월 3일자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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