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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 세라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의 고교생 딸이 임신 5개월이라는 사실이 미국 대선의 향방을 좌우할 중요한 사건으로 대두되었다. 공화당과 존 매케인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진영은 이 파문을 잠재우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고, 전당대회에 페일린의 딸과 그녀의 남자 친구까지 등장시켜 이 문제를 정면 돌파할 것임을 시사했다. 여전히 공화당 안팎의 후폭풍이 거세지만 이 문제는 서서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이다.

오바마의 사려 깊은 배려

이 사건이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다뤄지는 과정에서 우리가 유심히 보아야 할 점이 있다. 바로 미국 정치사회의 건강함이다. 언론과 정치인, 그리고 관련 학자들은 이 문제에 차분하고 진지하게 접근했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언론조차도 이 문제가 17세 소녀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접근했고, 여성 정치인들은 당파를 떠나 가정사와 공적인 일을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학자들도 이 문제를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공통의 문제로 전환시킴으로써 누군가에게 사회적 낙인을 찍는 행위를 최대한 경계했다.

무엇보다 우리의 주목을 끄는 모습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버락 오바마의 태도이다. 오바마는 이 문제와 관련된 질문을 받고, 누구도 이 사건을 선거와 결부시켜서는 안 되며 자신의 선거운동원 중에서 누구든지 이 문제를 선거에 이용한다면 곧 해고될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8월에 매케인이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집이 몇 채인지 잘 모른다고 대답한 것을 놓고 맹렬하게 비난한 것과는 너무나 다른 태도를 보였다.

물론 정치적 계산이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10대의 임신 문제로 누구보다 큰 고통을 겪는 흑인들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고, 힐러리 클린턴 지지자나 여성단체가 어떻게 바라볼지를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덧붙인 말은 이런 태도가 정치적 고려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주기에 충분했다. “내 어머니는 18세에 나를 가졌다. 어떤 가정이 10대 자녀들을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가 정치적 사안이 되어서는 곤란하다”고 말한 것이다. 즉, 자신의 가정사를 돌이켜보면서 가지게 된 연민과 정치인으로서의 품위(decorum)가 한몫을 한 것이다.

오바마는 정치 커뮤니케이션이나 정치적 수사를 연구하는 사람에게 이미 탁월한 연설가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오바마를 향한 미국인의 기대가 단순히 화려한 말솜씨에서 비롯되지는 않았다. 단어 하나의 선택에도 상처받을 사람을 배려하고자 하는 노력, 변화에 대한 열정만으로는 갈등만 증폭시킬 뿐이라는 현실적 판단, 그리고 정치인의 말이 갖는 교육적 효과에 누구보다 민감한 정치가로서의 안목을 대중이 발견한 것이다.

사회갈등 조정은 정치인의 덕성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는 다양한 갈등을 경험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갈등은 불가피하고, 잘 조정만 된다면 공공선을 실현하는 데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갈등을 조정할 메커니즘이 없는 경우 증폭된 갈등은 모든 시민에게 커다란 해를 끼칠 수 있다. 이때 무엇보다 필요한 점이 정치인의 신중하고 사려 깊은 태도이다.

이것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테네의 페리클레스가 보여 준 리더십이고, 마키아벨리가 피렌체의 지도자에게 요구한 덕성이며, 어느 사회 못지않게 정치사회적 문제가 산적한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축제로 비치는 이유이다. 우리 사회도 신중하고 사려 깊은 정치 지도자를 통해 더욱 품위 있고 안목을 갖춘 정치를 경험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곽준혁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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